우리 부모님
펠레 포르셰드 지음
우리 부모님
한 남자가 눈발이 날리는 산을 오르고 있다. 그의 등에는 지게가 짊어져 있고, 그 지게에는 늙은 노파가 실려 있다. 남자는 산 중턱에 오르자 늙은 노파를 차가운 땅에 내려놓고 산을 내려가려 하지만,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노파는 산을 올라올 때 가져온 도시락을 남자에게 건네면서 손을 휘 저으며 어서 내려가라고 손짓한다. 아들은 늙은 어머니를 산에 그렇게 남겨 두고 내려온다. 산 아래 남아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
[우리 부모님] 이야기
만화 [우리 부모님 (Nos Parents)]은 스웨덴에서 노인 케어 서비스를 담당하는 작가 펠레가, 본인이 경험하거나 주변의 케어 도우미 친구들이 경험한 일들을 여덟 편의 에피소드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특히 작가가 직접 경험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만화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노인복지의 허점과 모순을 냉철하면서도 위트 있는 시각으로 풀어냈다.
구넬 할머니를 케어하려 가는 노인 케어 도우미 펠레. 그런데 그 할머니의 아들이 기독민주당 당원으로 노인복지 문제에 관심이 높은 열혈 당원이라는 게 영 부담스럽다. 할머니의 아들은 노인 케어 도우미를 히어로라며 찬사를 늘어놓으면서도 도우미 서비스를 조목조목 따지고 그것도 모자라 깐깐하게 요구한다. 칭찬하면서 챙길 것 다 챙기는 가족답게 도우미의 일거수일투족을 CCTV로 감독한다. 그러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그 책임이 도우미 펠레의 근무태만으로 돌려진다. 하지만 정작 CCTV에 놀랄 만한 일이 녹화되어 있었다.
할머니를 목욕시키는 펠레. 갑자기 응급 서비스 요청 전화가 걸려온다. 잉그마르 할아버지 아파트에 도착한 펠레. 하지만 할아버지의 응급 요청은 몸이 간지럽다는 것. 할아버지를 목욕시키고 약국에서 연고를 처방받아 치료를 한다. 급기야 할아버지는 연고 없이는 단 하루도 지내지 못하지만, 펠레의 서비스에 대한 불만으로 도우미 센터와의 연락을 끊어버린다. 걱정이 된 펠레는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할아버지는 연고를 온몸에 잔뜩 바른 채 소파에 앉아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왠지 슬프지 않은 손자와 손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모습을 안 봤기 때문에 슬프지 않다고 생각한 손자 에드빈은 장례식장에서 몰래 관을 열어 할아버지의 주검을 확인하는 대담한 행동을 벌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빠와 엄마는 장 볼 이야기와 할아버지 유품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엄마와 아빠에겐 할아버지의 부재는 벌써 일상생활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손자 에드빈은 할아버지의 죽음이 이제야 슬퍼진다.
임종을 앞둔 노인의 시선. 항상 오던 도우미가 아파서 다른 도우미들이 계속 집을 드나든다. 도우미들은 노인을 위해서 약을 챙기고, 블루베리 차도 데워 주고, 진통제도 놓아준다. 너무나 편안하고 아쉬운 것 하나 없을 법하건만, 노인의 시야에는 지난 과거의 일들이 영화 장면처럼 떠오른다. 사랑해서 즐거웠던 순간들과 이별해서 눈물 났던 날들이.
노인 케어 도우미 일을 했던 만화가의 경험을 담은 이 만화는 노인복지의 현실적인 실상, 노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남겨진 가족의 감정, 케어 도우미의 고충, 노인과 케어 도우미 혹은 노인의 가족과 케어 도우미 사이의 갈등과 오해 등을 노인과 케어 도우미, 가족의 시점을 통해서 잔잔하면서도 거침없이, 무거우면서도 유머와 위트 있게 풀어내고 있다. 이 만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꾸민 이야기로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띤 그래픽노블이다.
이 작가가 궁금해! – 펠레 포르셰드(Pelle Forshed)
펠레 포르셰드(Pelle Forshed) Ⓒ http://www.kulturdelen.com/
1974년에 태어났으며 스웨덴의 만화가이자 삽화가이다.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아버지 닐 포르셰드의 영향을 받은 펠레 포르셰드는 스웨덴에서 〈스톡홀름 나이트〉 주간 만화를 그린 것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스톡홀름의 유흥의 밤 풍경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스톡홀름 나이트〉는 여러 해 동안 대형 신문사에 연재가 되었다. 펠레는 어린이 책 삽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만화의 재미는 바로 이것!
사실 이 만화의 첫 번째 재미는 만화 텍스트 밖, 다름 아닌 두 개의 만화 제목에서 찾을 수 있다. 스웨덴어 만화책의 원제목은 [가족 ; 여덟 편의 단편 소설 (De anhöriga : åtta tecknade noveller)]이지만, 한국어 만화책은 프랑스어로 번역된 만화책1)으로 번역했기에 [우리 부모님(Nos Parents)]으로 출간되었다. ‘가족’이나 ‘우리 부모님’이나 그 의미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이 만화의 주제가 현실적인 무게감을 갖고 있다 보니 두 제목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스웨덴어 만화책의 원제목 [가족]은 노인복지 문제를 제도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돼야 할 대상인 동시에, 무엇보다 기본 공동체로서 가족 구성원(혹은 사회 구성원)이 육체적 ∙ 정서적 차원에서 담당해야 할 몫(혹은 의무)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원제목 [가족]에는 생로병사의 모진 과정을 ‘우리 부모님의 이야기’로만 관망하는 타자의 자세가 아닌, 함께 경험하고 함께 아파해야 하는 가족의 역사로 공유하려는 의도가 짙다. 그런 관점에서 스웨덴어 원제목에는 노인의 소외 감정마저도 제도로 관리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스웨덴식 사회복지 제도에 대한 만화가의 비판이 암묵적으로 묻어난다.
이 만화의 두 번째 재미는 무거운 듯 그렇지만 무겁지 않은 만화가의 그림에 있다. 만화가는 때로는 지저분하고 때로는 구차하며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한 노인들의 일상생활을 조목조목 잘 그려냈다. 이게 바로 노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만화가의 시선은 세심하고 날카롭지만, 이 무거운 주제를 만화가는 탁하거나 어둡게 그리지 않았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만화가의 이력 덕분인지 만화의 색과 드로잉은 마치 팬시 스타일을 보는 것처럼 깔끔하고 따스하다. 그래서 만화를 읽는 내내 격한 감정으로 섣불리 동화되기보다, 적당한 거리를 둔 시선으로 등장인물의 처지를 차분하게 관찰하면서 이야기에 감정이입하게 된다. 사소한 연출 하나, 무심코 넘어갈 수도 있는 대사 하나에 자신의 의도를 숨겨 둔 만화가의 내공이 놀랍다.
이 장면이 압권이다!
이 만화의 최고 압권은 단연코 믿었던(?) 스웨덴에 대한 배신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이 장면이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보육, 남녀평등, 최상의 사회복지, 노동자 국가 이미지 덕분에 전 세계인 가장 부러워하는 북유럽 복지국가의 전형으로 어김없이 손꼽히는 스웨덴. 그런 스웨덴에도 복지의 그늘은 존재한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에피소드 <점심식사>의 한 장면이다.
먹다 남은 냉동만두를 데워서 할머니에게 먹이는 펠레. 휠체어에 앉아 거동도 불편한 할머니는 만두를 먹자마자 토하고 만다. 몸과 마음이 바쁜 펠레는 양동이를 가져오는 것으로 케어 도우미의 역할을 다한다. 그 순간 텔레비전에서 스웨덴 사회복지 서비스에 대한 동상이몽의 진단과 자화자찬의 멘트가 흘러나온다. 펠레는 떠나고 결국 남겨진 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내일 날씨 소식과 텔레비전만 멍하게 응시하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할머니뿐이다.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자, 위성 사진을 보시면…”